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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모두레터 Vol.04] <우중산책> 정자로서의 삶 상영담당자  |  2020.07.30  |  조회 47

정자로서의 삶
임순례 <우중산책>(1994)

로튼토마토, IMDB, 씨네21, 왓챠, 검색포털, 영화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다양한 플랫폼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영화는 별점이라는 관문을 거친다. 플랫폼 마다 별점의 기준은 다양하지만 관객들은 별점의 기준보다는 별의 개수에 관심이 더 많다. 별점은 통속적으로 우리가 이 영화에 흥미를 가질 수 있을지, 결과적으로 영화를 모두 관람한 후 내가 투입한 돈이 아깝지 안 아까울지에 대한 점궤 같은 것이다.
하지만 별점이 영화의 절대적인 가치라고 보기는 어렵다. ‘영화보기’가 말 그대로 보는 행위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절대적 기준은 영화를 보는 ‘나’이다. ‘나’라는 필터가 지금 보고 있는 영화에서 어떤 것은 걸러내고 어떤 것은 거르지 않을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영화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나의 총체적인 모든 감각과 사고들이 기준이 된다.

<우중산책>은 십 년 전에 보았던 영화고, 그 당시에도 십 년도 더 된 영화였다. 영화 속 배경인 극장의 낡은 이미지들은 내가 살았던 소도시의 단관극장과도 흡사했지만, 극장을 홀로 지키고 있는 ‘노처녀’의 심상을 읽어내기에는 어렸었다. 그땐 ‘노처녀’라는 말이 사회에 살아있었다. 서른 이후의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을 지칭하던 단어. 25세 이상의 여성을 25일이 지나면 쇼케이스에서 사라져 버리는 크리스마스 케이크에 비유하던 세상. 여성의 나이와 외모를 물건으로 치환시키는 저열함들이 아무렇지 않았던 시대 속에서 <우중산책>은 ‘권태에 빠진 노처녀의 일탈’ 정도였다. <우중산책> 속 정자와 모든 여성에게 가지고 있던 잣대와 관점이 딱 그만큼이던 시기. 과장하자면 새로움과 사건이 없는 삶이 마치 정자가 ‘노처녀’이기에 가능한 것처럼 생각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 후 십 년이 지나 정자가 살던 시대가 지나갔다. 나는 ‘노처녀’ 정도의 나이가 되어 <우중산책>을 다시 보게 되었다. 영화는 그대로였지만 영화 속의 많은 것들이 나의 기준과 함께 변해버렸다. 크레딧을 장식하는 많은 ‘남’들, 젖은 머리를 말리는 정자, 극장.

극장은 남성의 공간이다. 극장 안은 에로티시즘이 느껴지는 영화포스터들이 가득 메워져 있고, 액션영화의 엠비언스사운드가 끊임없이 들린다. 남성들은 어디서든 누울 수 있고, 자신의 욕망을 스크린에 투영하며, 가부장의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기도 한다. 정자를 둘러싼 상황엔 항상 너절한 남성의 모습이 발에 채이고 눈에 밟힌다. 오래전에 쓰인 평론은 이들을 ‘꿈을 만들어 파는 영화관에서조차 별다른 꿈을 꿀 권리도 잊어버린 사람들’이라고 묘사하는데, 이 문장에서 ‘사람들’은 정자를 제외한 ‘남성’ 이다. 극장 안 남성들은 정자를 ‘노처녀’로 대상화하는 존재들이다. 정자를 ‘노처녀’로 존재하게끔 하는 남성의 말들, 질문, 태도. 정자는 꿈을 꿀 권리를 잊어버린 남성들에게 필요하지 않으면서도 필요하다. 정자는 그들을 위해 남성이 욕망이 투사된 필름을 되감고, 뒤처리할 휴지를 건내고, 영업사원의 고객이 된다.


맞선을 볼 ‘노처녀’ 라는 설정에는 사회적인 시선이 담겨있다. 남성과의 극적인 만남을 고대하고, 노처녀가 되기 전 처녀의 모습을 간직하고자 분투하는 초라한 여성. 우리는 시대와 사회적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지금에서야 우리는 정자를 있는 그대로의 정자로써 볼 수 있지만, 어린시절의 나는 사회적 각본 속에 살아 숨쉬는 노처녀의 상을 정자에 투영해 영화를 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꿈을 꿀 권리도 잊어버린 사람들’은 지금의 나라는 기준을 가지고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캐릭터는 시대를 투영하기도 하지만, 시대가 캐릭터에 투사 되기도 한다. 아무 곳에나 누워 자는 남성, 물건을 팔기위해 집요하게 따라붙는 남성, 하릴없이 성인영화를 보는 남성. 정자가 가버린 지금 시대엔 아무 곳에서나 누워자는 남성은 아무 곳에서나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 할 수 있고, 상품을 팔기위해 길거리에 진을 치는 남성들은 여성의 팔목을 아무렇게나 잡아당긴다. 하루종일 성인영화를 보는 남성은 불법 포르노를 넘어 영상기계를 통해 일상 속의 여성의 몸 구석구석을 폭력적으로 해 집는다. 정자를 노처녀로 읽어내는 시대에서 정자를 정자로 보려는 시대로의 변화는 너무도 마땅하다.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그러나 정자를 둘러싼 환경은 어째서 더 뒤틀려 버린걸까.

빗속을 산책하던 정자는 다시 극장으로 돌아온다. 어깨 한쪽으로 고이 모은 긴머리를 천천히 닦아내는 정자의 주변엔 여전히 남성들이 있다. 젖은 머리를 말리는 정자를 보면서 스릴러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지인의 말처럼 여성이 머리를 말리는 장면은 2020년의 현실이 투사되어 또 다른 감상을 만들어낸다. 현실이 투사된 과거의 장면은 자꾸만 그 이면을 들춰보고 싶게끔 만들고, 정자의 일상 이면에 숨어있는 불안을 자꾸만 알고 싶은 건 동시대를 살고있는 여성들의 근본적인 불안이다. 나는 정자가 정자로써 살고 있을 삶을 생각한다. 노처녀도 아닌, 불안도 아닌, 정자로써의 삶.

장주희(원주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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